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이즈미 준이치로 (문단 편집) === 젊은 시절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Junichiro_Koizumi_and_Junya_Koizumi.jpg]]}}} || || '''어린 시절, 아버지 [[고이즈미 준야]]와 함께''' || [[1942년]] 1월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총리들이 흔히 그렇듯 선거구를 3대째 세습해 온 정치 명문가의 3세 국회의원이다. 외조부 고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郎)는 [[야쿠자]] 조직 고이즈미구미(小泉組)의 보스로 시작하여 [[일본 제국]] [[중의원]]에서 12선 의원과 [[하마구치 내각]] - [[제2차 와카쓰키 내각]]에서 제33대 체신대신을 지냈다.[* 온 몸에 문신이 있었기 때문에 별명이 이레즈미([[문신]]) 대신이었다.] 부친 [[고이즈미 준야]]는 9선 중의원과 [[1960년대]] 방위청 [[장관]]을 지냈다. 준야의 성씨는 본래 '사메지마(鮫島)'였으나 마타지로의 외동딸인 고이즈미 요시에(小泉芳江)와 결혼[* 당시 준야는 마타지로가 간사장을 맡고 있던 [[입헌민정당]]의 일개 사무 직원이었는데 마타지로가 자신의 딸과의 관계를 반대하자 요시에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해 도쿄에서 동거를 시작했다고 한다. 마타지로는 이에 자신의 딸에게 돌아오라고 신문에 광고를 싣기도 했다. 결국 준야가 데릴사위가 돼서 마타지로의 뒤를 잇는 조건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한다. 참고로 준야는 3남 6녀중 차남이다.], 아내의 성씨를 따라 '고이즈미'로 성씨를 바꾸고 고이즈미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준야와 요시에는 장녀 미치코(道子), 차녀 다카코(隆子), 3녀 노부코(信子), 장남 준이치로, 차남 마사야(政也)를 낳았는데 2남 3녀 모두 '고이즈미' 성씨를 따랐다. 고이즈미는 가나가와 현립 요코스카 고등학교[* 지역에선 명문고이며, 아들 신지로는 요코스카 고등학교 입시에 떨어졌다.]와 명문 [[게이오기주쿠대학]][* [[삼수]]를 해서 입학했다.]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영국]]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로 유학을 갔다. [[런던]]에서 공부하던 중 부친 준야가 급사하는 바람에 갑자기 귀국하여, 부친의 지역구를 물려받아(가나가와 2구) 총선에 출마하면서 27세의 나이로 정계에 입문했다.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고이즈미 첫당선.jpg|width=250]]}}} || || '''1972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첫 당선된 고이즈미''' || 그러나 27세에 처음 출마한 선거인 1969년 중의원 선거에서 낙선했고[* 소선거구제로 전환한 이후로 편하게 당선되는 입장이 되었지만 이때 가나가와 2구는 상대적으로 자민당 약세 권역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다가와 세이이치가 자민당을 탈당하고 신자유클럽에 합류하면서 1990년 중의원 선거구를 제외하면 해당 선거구에서 당선자 5명 가운데 1명만 자민당인 대표적인 자민당 약세지역이 되었다.],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 우파의 거두인 [[후쿠다 다케오]] 前 총리의 [[비서]]로 들어가 정치를 배웠다. 이후 29세 때 처음 중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로 12선 의원을 지냈다. 대장성 정무차관, 후생대신, 우정대신 등의 각료를 역임했다. 우정대신 때부터 민영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고, 결국 뜻을 이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